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KBS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필자가 말하는 귀주대첩 고려군 20만 동원의 진실

 

이 글은 KBS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 대한 리뷰입니다. 

글에서는 필자가 드라마를 보고 느낀 점을 공유하며, 귀주대첩과 강감찬 장군의 활약을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고려군 20만 명이 거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귀주대첩의 역사적 중요성과 당시의 전략 및 용맹함을 

강조합니다. 필자는 드라마를 통해 역사의 중요한 교훈을 되새기며 시청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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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Korea-Khitan War)

물론 역사교육학과 출신으로 보면 부족한 점이 안 보일 수가 없겠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앞뒤 꽉 막힌 자칭 역사 동호인 역스퍼거애들처럼

그런 애들이 아닌지라 그래도 나름 화면도 그렇고 연출도 그렇고 많이 세련돼졌다

옛날 KBS 대하드라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네라고 평가 내려보고 싶은데요

 

11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거란족의 요나라를 상대로

강감찬, 강민첨, 김종현 등이 중심이 된 고려군의 걸출한 활약으로

대승을 거두는 귀주 대첩(龜州大捷) 이 전투가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화려하게 장식할 것이라고 이미 일찍이부터 예고된 가운데

 

오늘은 희한하게도 소배압의 10만 대군 거란 요 황제 친위군 우피실군이 중심이 된

최정예 요나라군 기병대를 상대로 귀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투혼을 불사른 고려군의 병력 규모

관련 오래전부터 인터넷상에서 전해지는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기에 오늘은 필자 그걸 한번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뭐 굳이 이걸 언급해 볼 가치가 있나 싶기도 하고 이게 블로그 검색 유입 빵빵하게 끌어당길 수 있으려나

솔직히 그렇게 크게 신뢰는 가지 않는데요 그래도 필자 출신이 출신인지라 끝내 외면 못하고

한번 끝까지 달려보고자 합니다  

 

거란의 소손녕[소배압(蕭排押) 을 말함] 이 침략할 때 군사를 10만 명이라 하였다.

당시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로 있었는데, 왕이 명하여 상원수(上元帥) 를 삼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 을 부원수로, 내사사인 박종검(朴從儉) 과 병부낭중 유참(柳參) 을 판관으로 삼아

군사 20만 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興化鎭) 에 이르러 기병 1만 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 안에 병사를 숨기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개천을 막아서 기다리다가, 적이 이르자 막고 있던 물줄기를 터뜨리고 복병을 일으켜 크게 이겼다.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경성으로 나아가자 강민첨이 추격하여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에 이르러

또 크게 이겼고, 시랑 조원(趙元) 이 또 마탄(馬灘) 에서 공격하여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듬해 정월 강감찬은 거란병이 개경을 위협하자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 에게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급히 개경으로 들어가 지키게 하고,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도 또한 군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이때 거란이 군사를 돌려 연주(漣州) 위주(渭州) 에 이르자 강감찬 등이 숨었다가 공격하여 500여급을 베었다.

2월에 거란의 병사가 귀주(龜州) 를 지나자 강감찬 등이 동교(東郊) 에서 맞아 싸우는데 양쪽의 군대가 서로

비슷하여 승패가 결정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종현이 군사를 끌고 달려오자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와서 군대의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아군이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격렬히 공격하니 거란병이 패하여 달아났다. 아군이 추격하여 석천(石川) 을

건너 반령(盤嶺) 에 이르니 시신이 들을 덮고 사로잡은 사람, 말과 낙타, 갑옷, 무기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고려사』권94, 「열전」7 [제신] 강감찬

 

최종 정리

 

이상하게도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대첩으로 평가받고 있는 귀주대첩은

거란 요나라군이 10만 명인데 비해 고려군은 20만 명이 동원됐다면서 일각에서는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이긴 싸움일 뿐이

라며 귀주대첩을 평가절하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고려사 사료를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고려군 20만 명은 강감찬 휘하로 편제된

총 전력이고 귀주대첩이 벌어지기 전 이미 각지로 이 병력이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양군의 규모가 비등했다는 기록이

저렇게 버젓이 남아있는바

 

귀주 대첩 당시 고려군이 20만이 몽땅 다 참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을 해보고 싶습니다

즉 알려져 있는 통념과 달리 고려군 전력이 우위였다가 아니라 양군이 비슷한 상황에서 김종현 기병대의 뒷치기로

고려군이 기가 막힌 망치와 모루 전술을 선보이며 승리할 수 있었다 이 말인 거죠

 

그리고 정말로 고려군이 20만 명이고 거란군이 10만 명이었다고 해도

자신들을 담그려고 잔뜩 화가 나서 달려오는 거란군 군마들 앞을 막아서며 당당하게 맞짱 뜰 생각을 한 것만 하더라도

고려군의 용맹과 기개 진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불패의 명장 태조 이성계의 첫 패배 조사의의 난을 너무도 아쉽게 묘사한 KBS 1TV 대하드라마 태종

전주 이씨의 중시조 고려 말 백전불패 어디서든 싸우면 늘 이기던 명장 사납고 날래기로 이름 높았던 여진족들을 수하로 거느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고려판 북방의 북부대공 태조(太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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