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 교과서가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1907년 고종의 헤이그 특사 사건 그 후 이야기

 

 

1907년에 조선의 26대 왕 고종 이명복이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 第二次日韓協約)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 제국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만천하에 폭로하기 위해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의 특사

헤이그 특사

 

현재 대한민국 근현대사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만 기술하고 있고

부족함이 많았지만 그래도 일본 제국의 침략을 알리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위대한 기거였느니

뭐니 이런 식으로 엄청 긍정적으로만 전하고 있는데

 

오늘은 필자가 여러분들께 헤이그 특사 사건

절대 한국 역사 교과서가 이야기하지 않는 숨겨진 이야기 하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7020_003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7월 20일 양력 3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헤이그 밀사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을 처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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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7월 20일 양력 3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헤이그 밀사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을 처벌하다

 

조령(詔令) 을 내리기를,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種), 이준(李儁) 의 무리들은 어떤 흉악한 성품을 부여받았으며 

어떤 음모를 품고 있었기에 몰래 해외에 달려가 거짓으로 밀사(密使) 라고 칭하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킴으로써 나라의 외교를 망치게 하였는가? 그들의 소행을 궁구(窮究) 하면 중형[重辟] 에 합치(合致)

되니 법부(法部) 에서 법률대로 엄히 처결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이 기록과

신임장의 어새 위조와 특사 자격 논란으로 인해

헤이그 특사는 가짜다 고종은 그런 거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말과 함께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는 울분을 견디다 못해 배 가르고 할복자살했다 순국했다 등의

온갖 풍문을 남기고 최종적으로 결국은 실패로 끝이 나버린 헤이그 특사 사건

 

왜 오늘날 한국 역사 교과서는 헤이그 특사 실패 후

조선 이씨 왕가가 저런 식으로 모든 책임을 이위종 이준 이상설 이 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건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지 않나 싶어집니다

 

일각에서는 순종실록의 저 기사 한 줄 가지고

헤이그 특사는 가짜다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필자가 보기에는 아니라고 펄쩍 뛰지만 뒤로 이명복이가 지시한 게 맞고 이게 문제 돼서

지가 골로 갈 것으로 보이니까 나는 보낸 적 없다고 통수치고 발뺌한 거로 보입니다

이게 딱 겁 많은 고종 이명복식 처신 법이었지요

 

그 을사조약도 오늘날 한국인들은 존나게 멋지게 고종이 끝까지 거부했다고 미화하고

빨아주는데 실상은 경들이 알아서 하시오 하고 지 혼자 뒤로 쳐 내뺐고 결국 조약 맺은 대신들만

을사오적으로 찍힌 것이고요

 

고종 이 사람은 절대 지가 책임지는 법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이씨 조선 27대 왕 518년 역사상

지 아들 순종 이척과 함께 최악의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직장에서 이런 타입의 상사나 사장 만나면 인생 좃 되는 타입

반면교사 삼아야 할 타입? 전형적인 갈라치기 꼬리 자르기의 대가 오늘날 평산 마을

문재인 같은 스타일?

 

끝으로 이위종 열사 이 사람 같은 경우는 당시에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3개국어를 할 수 있었던 초엘리트였던 사람이었는데

시대를 잘못 태어나는 바람에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선 지식인이었지요

 

결론은 이거 같네요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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