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1593년 3월까지 조선의 반격과 왜군(일본군) 의 피해를 알아보자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 모택동의 지원을 등에 업은

북한 김일성 패거리의 불법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한국 전쟁 때

북한군의 거침없는 진격으로 서울이 단 3일 만에 함락되고 대한민국이 경상남북도 일부만을

제외하고 함락됐을 때와 임진년 당시 조선의 형세가 비슷한 면모가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어연 60여 년이 흘렸음에도 국민들의 안보 의식은 참 형편없다고

할 수 있다. 헌데 하물며 200년 동안 평화기를 누린 당시 조선인들은 어떠했을까? 물론 변방에서 야인과

왜구들과의 충돌은 늘 있었지만, 대규모 국지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변란이 터질 때마다 조선의 국왕들은

기강이 해이해진 백성들을 걱정했는데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오는 부분이다.

 

 

1510년(조선 중종 5년) 각 지방의 관찰사에게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치라는 교지(3포 왜란 당시) 

 

흔히 임진왜란 이전 조선이 왜군의 침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조선은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늦게나마 전쟁 준비에 서둘렸다. 그러나 조선의 전쟁 준비는 오히려 과하여 민심이

준동하였을 정도였다.

 

왜군의 침략에 대비해 임진왜란 직전 성을 축조한 경상도 지방

 

임진왜란 이전의 선조 시기가 동서 붕당이니 기축옥사니 당파 싸움으로 조정이

시끄러울 때이기는 맞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왜군의 침략에 대비해 조선 조정에서의

적극적인 논의가 있었다. 우선 비변사의 요청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큰 읍성을

증축 수리하게 하였다.

 

한편 조선은 임진왜란 직전 명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하였다. 

1591년 이후에는 조선 조정에서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변방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남쪽 변방으로

내려보냈다. 그리하여 전라 감사에 이광 충청 감사에 윤선각 경상 감사에 김수가 임명되었고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 및 참호를 축조하도록 했다. 그러나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도대체 조정은 무엇 하는 짓이오?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괴롭히니 참으로 답답하오.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백성들은 조정의 무리한 전쟁 준비에 반발하였다. 한편 무리한 성읍 축조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는데 전라도와 경상도에 쌓은 성의 형태가 바르지 못하고 오히려 쓸데없이 규모만 

커서 넓은 성의 규모를 커버할 군사의 수효가 적어 제대로 방위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흔히 조선 선조가 멍청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선조의 머리는 뛰어난 편에 속한다. 

다만 그 좋은 머리를 좋은 데에 쓰지 않을 뿐 전쟁 이전에는 행정 업무 부분에서 선조의 능력치는

높은 편에 속하는데 임진왜란 직전에 선조의 기묘한 인사 정책이 진행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순신이 파격 승진을 통해 전라좌수사에 천거된 것이다.

 

이 무렵 조선 조정에서는 왜군의 규모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지금까지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사례에 근거해 왜군의 규모를 추정했는데 물론 역사적인 사례 3포 왜란, 을묘 왜변, 정해 왜변 등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왜군의 규모는 조선이 예상한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선조가 이르기를 을묘년 당시 왜적이 얼마나 되었는가?

 

변협이 아뢰기를 배 70척에 군사가 약 6천 명쯤 되었습니다.

 

선조가 이르기를 수만 명이 쳐들어올 기세는 보이지 않던가?

 

변협이 아뢰기를 왜선은 그다지 크지 아니하여 중국 배에 미치지 못하므로 한 척에 1백 명 밖에 

실을 수 없습니다. 1백 척이면 1만 명이니 1만 명 밖에는 더 나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이 내용은 1589년 조선 조정에서의 논의인데 당시 조선 조정은 왜군의 규모가 많아봐야 1만 명

수준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임진왜란에서 왜군의 규모는 15만 명이 넘어섰고 이는 조선 조정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게다가 200년의 장기간 평화로 인해 경상도 지역에서는 전패가 이어졌고 심지어 대구 지방에서 

수만여 명의 장정이 징집됐지만 장수가 도착하기도 전에 흩어지고 말았다. 당시 조선군의 기강은

너무나도 해이했고 조선군은 왜군을 보면 도망가기 일쑤였다.

 

1592년(선조 25년) 왜구가 쳐들어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곳곳에서 조선군의 전패가 이어졌고 결국 수도 한양까지 함락됐다. 당시 한양은 규모가 너무나도 커서

한양성 안의 장정들로 성을 지키기는 무리였다. 선조를 위시로 한 조선 조정은 임진강을 건너 평양

평양을 거쳐 국경 최전방인 의주 지방까지 파천했다.

 

그러나 왜군 일본군이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동안 왜군은 조선군의 배후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양으로

내달리고 이어 임진강을 건너 평양까지 내달렸기에 후방에 건재한 조선군에게 배후가 위협받았다.

 

게다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하였고 배후에서 건재한 관군은 왜군의 측방을 공격했다.

경상도 지역 의병은 적극적으로 봉기해 왜군에게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흔히 조선 왕조를 설명할 때 조선 왕조의 중앙 집권적 시스템과 행정력이 뛰어나다고 설명하는데

임진왜란에서 이러한 조선의 우수한 시스템과 행정력은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설명할 때 이순신 등 한 무장의 뛰어난 능력이나 아니면 의병의 항전 등으로 극복한 것처럼 

서술하는데 물론 이들의 비중은 적지 않다. 다만 임진왜란 극복에 있어서 조선 왕조의 중앙 집권적

시스템과 행정력이 어떻게 발현됐는지 이러한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선조와 조선 조정은 한양에서 의주까지 파천 했지만 조선 조정은 서해안을 통해 다른 지방과 적극적인 

접촉을 시도했다. 조정의 통제가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먼 경상도 지방에서도 여전히 의주로 파천한

조선 조정과 연락 체계가 닿고 있었고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관리들은 전란에 휩싸이지 않은 지역에서

의주 지역으로 곡식을 운송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이 왜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기는 했어도 조선 조정은 아직까지 왜군에게 건재한 지역의 

행정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주로 파천하는 과정에서 해서(황해도) 지방의 정예병 6천여 명을

징병하였고 남부 지방에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내 그곳의 전황을 적극적으로 살피게 하였으며

의주에 있던 조선 조정은 그러한 전황을 속속 보고받고 있었다.

 

흔히 대중 매체에서는 의주로 파천한 조선 조정이 무능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지만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참고하면 당시 조선 조정은 무기 운송, 군량 조달, 동원 체계, 작전 논의 

같은 전시 상황 하에서의 적극적인 논의를 전개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논의 or 의논이라고 검색해서 선조 시기 임진왜란 7년 동안의 기사 내용을 보면 

왜적과의 전투 상황, 무기 운송 및 군량 운반, 포로 처리 문제, 신무기 개발, 점령지 수복

지역별 군사 훈련, 염초(화약 무기 재료) 의 보급과 생산 등과 관련된 조정에서의 논의 상황이

1천여 건이 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혹여나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뒤져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https://sillok.history.go.kr/main/main.do;jsessionid=49103B3FF21D72B1B49213BB72ABDD41

 

1592년 8월의 기사들을 종합하면 의주에 있던 조선 조정은 남부 지방의 의병 상황 

심지어 경상도 지역에서 곽재우와 경상도 관리와의 갈등 상황, 왜적의 동향, 경상도 지역 백성들의

경작 상황 등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고

 

거리가 먼 전라도 지역의 방위까지 생각하여 신임 전라 병사 기용에 대한 논의도 전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의주에 있던 선조와 조선 조정은 전국에 사람을 보내 조선군 숫자와 동향을 파악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1593년 1월까지 조선은 자신들의 행정력을 발휘해 왜군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친 경상도 지역까지

병마의 숫자를 파악하게 하였다. 참고로 의병까지 병마의 숫자에 포함해 집결했는데 사실상

병농일치 사회인 조선 사회에서는 관군이나 의병이나 거의 똑같다고 보면 되고 의병 역시 조선 조정과

관군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의병까지 장악하고 있었기에 의병의 수효와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1592년 말 경상도 지역 조선군 상황 

 

경상좌도 안동부: 본도 순찰사 한효순의 군사 10,000명

경상도 울산군: 본도 절도사 박진의 군사 25,000명

경상도 창녕현: 의병장 성안의 군사 1,000명

경상도 영산현: 의병장 신갑의 군사 1,000명

경상우도 진주: 본도 순찰사 김성일의 군사 15,000명 

 

경상도 창원부: 본도 절도사 김시민의 군사 15,000명

경상도 합천군: 의병장 정인홍의 군사 3,000명

경상도 의령현: 의병장 곽재우의 군사 2,000명

경상도 거창현: 의병장 김면의 군사 5,000명 

경상도 지역 조선군 총병력: 77,000명 (1592년 말~ )

 

1592년 말 전라도 지역 조선군 상황

 

본도 좌수사 이순신의 수군 5,000명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수군 10,000명

전라도 각 지역 주둔군 10,000명

전라도 지역 조선군 총병력: 25,000명 (1592년 말~ )

 

1592년 말 함경도 지역 조선군 상황 

 

함경도 함흥부: 본도 절도사 성윤문의 군사 5,000명

함경도 경성부: 평사 정문부의 군사 5,000명

함경도 안변부: 별장 김우고의 군사 100명, 조방장 김신원의 군사 100명 

함경도 지역 조선군 총병력: 10,200명 (1592년 말~ )

 

1592년 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조선군 상황 

 

평안도 순안현: 본도 절도사 이일의 군사 4,400명과 사수 1,280명

평안도 법흥사: 본도 좌방어사 정희운의 군사 2,000명과 사수 223명 포수 50명

의병장 이주의 군사 300명과 사수 70명

소모관 조호익의 군사 300명

평안도 용강현: 우방어사 김응서의 군사 7,000명과 사수 770명 

조방장 이사명의 군사 1,000명과 사수 90명

 

대동강 하류: 수군장 김억추의 군사 300명과 사수 120명 

평안도 지역 조선군 총병력: 17,903명 (1592년 말~ )

 

황해도 황주: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의 군사 1,800명

재령군: 우방어사 김경로의 군사 3,000명

연안부: 본도 순찰사 이정암의 군사 4,000명

황해도 지역 조선군 총병력: 8,800명 (1592년 말~ )

 

서부 중부 동부 전선의 조선군 상황 

 

경기도 조선군: 19,300명

충청도 조선군: 10,800명

강원도 조선군: 2,000명 

경기 충청 강원도 조선군 총병력: 32,100명

 

 

1593년 1월까지 조선 조정은 전국의 군사 수효를 파악해 기록했고 

그 수효는 17만 2천 4백 명에 달하였다. 초전에서 임진강 전투에서 조선군이 와해됐으나 

일부는 다른 관군과 연합해 전력을 보존했고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 5만이 왜군의 공격을 받아 

패퇴했지만 일부 장수들은 전력을 보존해 후일을 도모했다.

 

조선은 자신들의 뛰어난 동원력을 바탕으로 1592년 말 무렵에는 반격의 기회를 마련했고 

의주에 있던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이 참전하자 평양에 대한 제한적인 반격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평양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남부 지방에서도 조선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왜군이 초전에 한양까지 진군하느라 미처 점령하지 못한 곳곳에서 조선군의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경상도 절도사 박진이 지휘하는 1만여 명의 조선군이 경주성 가까이 진군하여 왜군의 배후를 위협했고

조선의 신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왜군의 진영에 떨어뜨렸다.

 

 

실록의 묘사에 의하면 당시 왜군은 비격진천뢰라는 조선의 무기를 몰라 서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자기들끼리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가 그 속에서 터져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고 한다. 순식간에 20여 명의 왜군이 즉사했고 절도사 박진이 지휘하는 조선군 1만여 명의

대대적인 공격과 함께 경주성을 수복했다.

이때 절도사 박진은 군량 1만여 석을 노획하는 매우 큰 성과를 얻었다.

 

 

여기서 시선을 조선 전역으로 돌려보면

권율 장군이 이끈 전라도 관군의 활약으로 왜군의 전라도 공격이 좌절되었고 (이치 전투 승리)

경상도 절도사 박진의 활약으로 경상도 경주가 수복되는 등 곳곳에서 왜군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남해안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5천여 명이 왜군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고

 

이러한 총체적 난국에서 왜군은 다시금 경상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진주성 공략을 준비한다.

 

경상도 지역 조선군의 주력이 진주성에 있는 것 같으니 진주의 조선군을 멸하면 

다시금 반격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왜군 총사령관 우희다수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うきたひでいえ))

 

1592년 8월 초부터 진주 방면을 위협하더니 급기야 총사령관 우키타가 지휘하는

3만여 명의 왜군이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조선시대 진주성 전도

(내성과 외성이 존재하며 절벽과 해자 그리고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그러나 조선군의 성공적인 방어전으로 인해 진주성을 공격하던 왜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는데 지휘관이나 부관급이 300여 명이 넘게 전사했고 1만여 명이 넘는 왜군이 진주성에서

사망했다 (조선 시대 진주 대첩)

 

한편 함경도까지 진출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어떠했는가?

 

조선 침공군 제2군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かとうきよまさ)) 의

2만 2천여 명의 군대는 곧바로 함경남북도로 진군 했다. 당시 함경남북도는 곳곳에서

조선인 반란군의 준동과 가토가 이끄는 왜군의 침공 여진족의 국경 침입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가 이끄는 조선 관군과 의병의 공격을 받아 가토의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정문부가 이끄는 조선군 기병대는 가토의 군대를 상대로 석성령과 길주에서 크게 승리했고 

가토의 군대가 남쪽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조선군 기병대의 공격을 받거나 또는 혹독한 추위로

인해 이 일련의 과정에서 가토가 이끄는 왜군 제2군 8,864명이 사망했다.

 

함경도에 주둔한 조선군 기병대는 후일 선조의 명으로 여진족 노토 부락 토벌 때 활약하기도 한다

(여진족 1만여 명 학살)

 

왜군의 전황이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 전라도 방어에 성공한 권율은 1만여 명의 군사로 

경기도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경기도 지역에서 세력을 보존하고 있던 조선 관군도 반격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독성산성 전투에서 2만여 명의 왜군이 권율과 경기도 지역 조선 관군에게

패퇴했다

 

 

(행주 대첩 당시 권율은 도원수가 아니다 짤의 권율 직위와 내용은 무관) 

 

경기도 방면에서 왜군을 위협하던 권율은 행주 산성으로 들어가 왜군과 대치했고

승자총통(勝字銃筒) 및 진천뢰(震天雷) 지신포(紙神砲) 대중발화(大中發火) 등 

조선의 화기 등을 동원해 왜군 보다 화력에서 우위를 점하였고 이러한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왜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행주 대첩은 돌멩이 날라서 이긴 게 아니다 조선의 우수한 화력을 동원해

이긴 것이다.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가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어 죽을 위기에 몰렸을 정도였고 

간신히 부하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왜군 1만 5천여 명이 전사했고 9천여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우키타 히데이에 중상 석전삼성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いしだみつなり) 와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 きっかわひろいえ) 가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 시대 행주 대첩

 

1593년 3월 이후 한양에 재집결한 왜군의 총병력은 53,000여 명으로 

주력 부대의 손실률은 44.7%였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2차 진주성 공격전까지

일본에서 출병한 총병력은 201,470명으로 개전 시 158,700명이었고 이후 1년간 42,700명이

추가로 증원됐다. 그러나 이 가운데 75,613명의 왜군이 1593년 3월까지 조선 땅에서

사망했고 잔존 병력은 125,857명이었다

 

 

1593년 초 조선 전역에서의 왜군 9개 군의 병력 손실 현황 

 

1군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こにしゆきなが) 평안도 진군

18,700명-> 6,600명 손실률 64.5%

 

2군 가토 기요마사 함경도 진군

22,000명-> 13,136명 손실률 40.3%

 

3군 흑전장정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くろだながまさ) 황해도 진군

11,000명-> 7,321명 손실률 33.4%

 

4군 모리승신 모리 카츠노부(毛利勝信 もうりかつのぶ) 강원도 진군

한국에서는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라고도 알려져 있음

14,000명-> 6,000명 손실률 55.0%

 

5군 복도정칙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政則 ふくしままさのり) 충청도 진군

25,000명-> 15,500명 손실률 42.0%

 

6군 소조천륭경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こばやかわたかかげ) 전라도 진군

15,700명-> 9,552명 손실률 39.1%

 

7군 모리휘원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もうりてるもと) 경상도 진군

30,000명-> 17,000명 손실률 44.0%

 

8군 우키타 히데이에 총지휘부

10,000명-> 5,352명 손실률 46.5%

 

9군 도요토미 히데카츠(豊臣秀勝 とよとみひでかつ / とよとみのひでかつ) 후방 담당

한국에서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 라고도 알려져 있음

11,500명-> 5,000명 손실률 57.0%   

 

 

제1군으로서 조선 전역에서 선봉을 자처했던 고니시 군단의 손실률이 제일 높으며

총 지휘부인 우키타 군단의 피해와 3월에 왜군에게 한양 집결령이 떨어졌을 때

왜군은 전쟁의 이후 전개 상황과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 전역에서 명군의 참전은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왜군이 한양에서 이후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조선군 결사대가 용산에 침투하여 왜군이 먹을 2개월 분량의

군량을 모조리 불태웠다.

 

전라도 나주 의병장 김천일이 근왕(왕을 구함) 을 위해 북상하다 강화도에 머물 때 

전라도와 의주의 조선 조정 간 연락이 시도되고 있었다. 이때 의주의 조선 조정은 한양에

결사대를 투입했으며 한편 충청 지역에서 충청수사 정걸이 지휘하는 조선군 결사대가

용산창(식량 창고) 을 기습했다.

 

당시 왜군은 용산창에 많은 군량을 집중시켜 2만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는데

조선군 결사대의 습격으로 군량이 모조리 소실되자 왜군은 경기 남부 지역에서

분탕질을 시도하였고 가뜩이나 행주대첩의 패배로 경기지역의 왜군은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경기도 방면 조선 관군의 적극적인 공격을 받아 경기 방면의 왜군은

지리멸렬 해졌다. 이후 휴전 회담을 통해 잠시 잠잠해졌으나 도요토미의 재침 선언

정유재란으로 인해 또다시 조선 8도는 병화에 휩싸이게 된다.

 

 

3줄 요약

1.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공과 배후에서 조선군의 적극적인 공격 전개

2. 명군의 참전에 따른 전황의 우세 진주대첩 행주대첩에 따른 왜군의 피해 속출

3. 1593년 3월까지 누적된 왜군의 피해 (일본 측 수치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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