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완안부 여진의 금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사료들 모음

 

요나라 말기에 요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생여진의 일부였던 지금의 하얼빈 일대에 터를 잡고 있었던

완안부가 성장하여 세운 나라 금나라 대금(大金)

이들은 걸출한 지도자 태조 원황제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 

태종 열황제 완안오걸매(完顏吳乞買) 등과 함께 성장하며

 

북송을 송두리째 박살 내고 강남으로 몰아낸 뒤 중원 화북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들의 과거 지배자 노릇을 하던 요나라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 를

말 그대로 제대로 참교육 멸망 크리 타게 해주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데요

 

과거 여진족 시절 동북 9성 반환 문제에 윤관의 여진 정벌 문제로 제대로 엮였고

오랑캐로 보고 완전히 무시하던 애들이었는데 갑자기 힘이 막강해졌다면서 우리를 상국으로

모셔라는 금나라의 요구에

 

일단 고려는 겉으로는 금나라를 상국으로 대우해 주긴 했는데 실상은 아 저 미개한 오랑캐 색히들

하면서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고 금나라 또한 고려가 자신들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제반 사정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고려를 통제하지는 못하고 그냥 적대하지만 않는 선에서

만족하며 두 나라 관계가 12세기 내내 그렇게 이어지게 되는데요

 

그래서 살펴보게 되는 그때 당시의 고려 금나라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사료들

자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 사이 과거의 악연은 다 잊고 형제부터 시작하자며

형제의 맹약을 제시하는 조서를 아골타가 고려에게 보냈으니 깡그리 씹어버리고

몇 년 후에는 완안아골타 보고 너라고 부르는 국서를 보낸 고려 

 

2. 아골타에게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로 추정되는 당시만 하더라도 요나라 영토였던

보주 반환을 요구하자 니들이 직접 가져가라며 웬일로 순순히 물러서준 금나라와 

금나라 초대 황제 태조 아골타

 

3. 장사 1천 명만 주면 금 황제를 잡아 바치겠다는 최봉심

직문하성(直門下省) 안직숭(安稷崇), 우간의(右諫讓) 이신(李伸), 중서사인(中書舍人) 임존(林存)

좌사간(左司諫) 최함(崔諴) 등이 아뢰기를, “동경지례사(東京持禮使) 의 서장관(書狀官) 최봉심(崔逢深)

은 본래 무예로 선발된 사람이므로 서장관은 그 직책이 아닙니다. 또 그는 일찍이 ‘나라에서 나에게

장사 1천 명만 준다면 곧바로 금으로 들어가서 그 국주(國主: 금 황제) 를 사로잡아 바칠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한 바 있습니다. 그 광망(狂妄) 함이 이와 같으므로 괜히 일을 만들까 두려우니 사신으로

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4. 금나라의 칭신 요구를 극구 반대하는 윤관의 아들 윤언이

바야흐로 금(大金) 이 전성기를 맞아 우리 나라를 신하라고 부르게 하고자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어지럽게

논의하였는데, 공이 나서 간쟁하여 말하였다. “임금이 환난을 당하면 신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니,

신하는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습니다. 여진은 본래 아조(我朝: 고려) 사람의 자손이기에 신복(臣僕) 이

되어 누차 조천(朝天: 고려의 천자를 배알) 해왔습니다.

 

그 호적이 모두 아조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거꾸로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때에 권신 이자겸이 임금의 명령을 제 멋대로 정하여 금에 신하를 칭하면서 서약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진정 인종의 맑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공이 매우 부끄러워하고 슬퍼하였다.

 

윤언이 묘지명 中

 

5. 압강을 공격해 금나라의 보루를 불태우고 부숴버린 고려군

1164년 압록강 보루가 (고려의) 침략을 받아 불타고 훼손되었다.

1165년 1월 세종 황제는 고려 신년축하 사절이 공무를 마치고 귀국하겠다고 인사를 오자

책망하기를 “변방에서 고려군의 사소한 침략이 많은데, 그대 임금이 시킨 것이냐? 아니면

지방 관원들이 저지른 짓이냐? 지방관들의 짓이라면 너희 임금이 막아야 할 것 아니냐?”라고

나무랐다.

 

6. 금 황제에게 신년 축하 예물로 옥대 대신 돌대를 보낸 고려

1177년 신년 축하 예물이 왔는데, 옥대라 하였지만, 옥은 아니고, 옥같이 생긴 돌로 만든 것이었다.

담당 관서에서 고려에 문서를 보내 질문하려고 하였는데, 세종 황제가

“저 소국은 옥을 식별하지 못해 옥이라고 말한 것뿐이다. 문서를 보내 따질 필요 없다”라고 하면서

질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7. 제 맘대로 무기를 들고 국경에 진입 대열을 벗어난 고려 사신

그해 12월 담당관이 보고하기를, 고려 사신으로 따라온 하급 압마관(押馬官) 순성(順成) 이란 자가

무기를 차고 3번씩이나 대열을 벗어났다고 하니, 세종 황제가 이르기를, 사신이 중대한 죄를 저지른

일이니 고려에 알려 그 나라에서 처벌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8.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금 사신을 입국 지연시킨 고려 조정

1183년 왕호(王皓: 고려 명종) 의 어머니 임씨(任氏) 가 훙서하자 왕호가 생일 축하 사절 및

하례 회사 등의 파견을 그만두게 해 줄 것을 청하므로, 조서를 내려 그 청을 따랐다. 1189년

장종 황제가 즉위한 후, 사신을 보내면 국경에서 지나치게 지체시킨다고, 고려에 국서를 보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니, 고려가 깊이 사과하였다

 

9. 역참에서 일하던 금나라 사람을 때려죽인 고려 사신단의 하급 관원

1192년 (고려 사신단의) 하급 관원 김정(金挺) 이 돌아가는 길에 평주(平州) 무녕현(撫寧縣) 에 이르러,

역참에서 일하는 하첨아라는 자를 때려죽였다. 이에 담당관서가 주청 하기를 "고려 사신이 오고 갈 때

적정한 숫자의 감시병을 붙여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0. 금나라 황제가 거하는 대궐 복도에서 휴대용 칼로 꿀배를 깎아 먹은 고려 사신

1204년 1월 1일 을축일 고려 사신의 하급 수행원이 대궐의 복도에서 패도(佩刀: 작은 검) 를 꺼내

배를 깎으며 내려가는 것을 봉직관이 발견하여 그를 규탄하였다. 장종 황제가 접반 관원을 불러

앞으로는 문서를 주어 그러한 행위를 엄금하도록 지시하라 하였다.

 

11. 금사 고려전 사찬

사관이 찬(贊) 하여 말하기를, “금나라 사람은 본래 말갈(靺鞨) 중에서 고려(高麗) 에 부속된 자들이다.

처음에는 이웃 나라로서 우호를 통하다가 얼마 후에는 군신(君臣) 이 되었는데, 정우(貞祐) 연간(1213~ 1216)

이후에는 도로가 통하지 않아서 겨우 한두 번 보았을 뿐이다

 

그밖에

 

1. 고려가 국력이 밀리는 형편이었음에도

요나라나 송나라에 을질 참 많이 했었는데 금나라에도 알게 모르게 을질

많이 했었습니다

 

2. 금나라 멸망 후 들어서게 되는 중국 왕조 원나라나 명나라는 힘의 차이가 너무 압도적이라

고려 조선 같은 한반도 왕조들이 완벽하게 중국 중심의 조공 책봉 관계를 순응하게 됩니다

 

3. 위의 저 기록들은 고려사, 금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4. 금나라 5대 황제 세종 완안옹(完顔雍) 금나라 6대 황제 장종 완안경(完顔璟) 은

금나라 최고의 전성기 시절입니다

이때 북쪽에서는 훗날 들고일어나는 최악의 기마민족 몽골 제국

태조 테무진 칭기즈 칸(Chingiz Khan) 이 화려한 기지개를 피우려고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5. 몽골 제국의 남진과 함께 23년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되는

금나라 멍청하게도 몽골 하나만 해도 벅차기 바쁜데 이 와중에 남쪽의 남송을

공격하는 개병크를 저지르며 전쟁의 판세가 양면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됨에 따라

남송과 몽골의 협공에 뒤늦게 우리 망하면 그다음은 너네라고 울부 짖는 것도

아무 소용 없게 되고 결국 금나라는 1234년에 몽골 제국에 의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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