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찰 일본 검찰 일본 공권력의 최악의 갑오브 갑 흑역사 아시카가 사건 스가야 토시가즈 사건

 

필자가 이번 글에서는 일본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건인

스가야 토시카즈 사건(일명 아시카가 사건(足利事件) 이라고도 불림) 을 한번 여러분에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어려운것 같고 쉽게 접하기 힘들어 보이고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선입견부터 가지는것이

많은 분들의 법에 대한 첫 인상 인지라 이 글을 여러분들이 별로 그다지 흥미 있게 안읽어주시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조금 들기도 하는것이 지금 솔직한 필자의 심정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사건은 일본 검찰과 일본 경찰 일본 사법계 일본 공권력의 최대 흑역사라고도

할수 있는 사건으로 읽다보면 여러분들이 분노가 치밀어 오를지도 모르는 사건인 만큼 다들 꼭 한번 꼼꼼하게 읽고

가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면서 사법이 제대로된 규정과 제어장치 없이 폭주해서 함부로 나가게 될경우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지 법을 휘두르는 위치에 있는 한 나라 사법 당국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것이지 한번 다들 머릿속에서

생각을 꼭 해주시기 바란다. 왜냐고? 스가야 토시카즈(菅谷利和) 사건(일명 아시카가 사건(足利事件)) 이게 바다 건

너 남의 나라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의 이야기 여러분 가족의 이야기 여러분 친구의 이야기가 될수도

있으니까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의 부실 과학 수사가 빚은 참극 일본 경찰 일본 검찰 일본 사법계 치욕의 흑역사

스가야 토시카즈 사건을 여러분에게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사건의 주인공: 스가야 토시카즈(菅谷利和) 당시 나이 47세

이 사건은 1990년 5월 12일날 시작된다. 일본 도치기 현(토치기 현 栃木県) 아시카가 시(足利市) 에

살고 있던 4살 여자 로린이가 어떤 괴남자에 의해 끌려간후 사라진다. 이후 이 여자 아이는 하천에서

알몸으로 발견되며 여자아이의 의복에서는 정액이 발견된다.

 

(당시 4세 여아의 시신이 발견된 하천 부지)

 

이 사건이 발생하자 당연히 아시카가 시 주민들은 발칵 뒤집혀 졌고 일본 언론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대서 특필하게 된다. 사건의 심각성으로 인해 일본 전국이 패닉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나 이 사건의 파장이 더욱 심했던 것이 과거 이지역에서 두차례의 아동 유괴 살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곧 이 사건의 범인을 잡고자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는데 여기서 일본 경찰의 희대의

병크가 터지게 된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7개월 동안 수사를 벌이지만 별다른 수완을 얻지 못하고

여론은 왜 아직도 범인 못잡냐고 압박하지 범인이 누군지는 계속 모르겠고 오리무중이지

에이 씨발 존나 귀찮네 우리 현장 수사고 나발이고 집어치우고 프로파일링 합시다

프로파일링 이런식으로 사건 수사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중요한것은 이 당시의 일본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은 지금에 비하면 정말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는거..

 

당연히 여기서 일본 경찰들의 개병신같은 추론이 시작되게 된다.

이 사건 범인은 독신남에 로리콘 같다ㅡ> 고로 이 동네에서 결혼도 안하고 음흉하게 독신으로 사는

새끼를 찾으면 된ㅡ> (여기서 사진의 주인공 스가야 토시카즈가 걸려듬)ㅡ> 어? 너 독신, 거기다 평소에도

좀 음흉 하다며? 씨발 너 범인 같은데?

 

이런 개병신 같은 추론과 함께 이때 일본 경찰이 증거로 제시한것이 바로 스가야 토시카즈가 딸딸이(DDR)

치고 밖에다 버린 휴지 였다. 지금 여러분이 다시 봐도 얼마나 병신같은 막무가내 일본 경찰의

우격 다짐으로 보이는가? 하지만 이 당시 일본 경찰은 오랜 수사에도 별다른 수완이 없었던 나머지 이성을 잃고

제 정신이 아니었던걸로 보여진다.

 

이때 일본 경찰의 주장은 니가 딸친 휴지 조사해보니까 그 범인 좆물이랑 일치하더라

고로 너 범인 OK? 평소에도 음흉한 새끼가 딸친 휴지 DNA까지 일치하네 님 범인요 이거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것이 90년대 초반 일본의 DNA 검증 기법은 프로파일링과 함께 매우

불확실 했으며(올바른 결론이 아닐 확률이 1%를 넘었다 함)

 

평소에 일본 법원에서도 DNA 검증 자료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다 아까도 말했지만 일본 경찰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이때 내세운 논리가 독신남은 로리콘이 많다.

생활 패턴도 단조로우며 규칙을 중시하는 부류의 사람이 엽기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같은 단순 무식한 방법 한마디로 이런 무식한 일본 경찰의 우격다짐에

아무 증거도 없이 아무 혐의도 없이 단지 재수가 없어서 걸려들어서

범인으로 몰린게 스가야 토시카즈 였다 이 말이다.

 

이 당시 스가야 토시카즈(菅谷利和) 가 이 사건의 가해자라고 주장한

모리시타 아키오(森下昭雄 1934.03.17~ ) 도쿄 경시청(東京警視庁) 형사 부장

 

이후 이 사람은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신남은 로리콘이 많다 같은 주옥같은 개소리와

난 룰대로 수사 했다 자백도 받았으니 난 지금도 스가야가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소리만 자신의

블로그에 해댔을뿐 스가야 토시카즈 한테 끝까지 사과 한번 하지 않는다 참고로 모리시타 아키오

도쿄 경시청 형사 부장의 당시 블로그는 분노한 일본 네티즌들의 항의에 폭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상식적으로 봤을때 스가야 토시카즈는 전혀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일본 경찰은 심상치 않은 국민들의 여론과 질타 비난에 어떻게든 빨리 한 새끼 잡아다

조져야겠다 라고 생각한 나머지 결국 억울한 스가야 토시카즈 를 제대로 조사도 안하고 그대로

혐의를 확정지어서 감옥에 쳐 집어넣어 버리게 된다.

 

이후 계속된 스가야 토시카즈의 항소심에서 그는 수사 과정중 일본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고

자백 하라고 온갖 욕설을 일본 경찰에게서 들었다고 고백하지만 이는 다 무시 되었고 결국 그는

91년 12월 2일 외설 목적 유괴 살인죄로 구속되고 다음해 92년부터 본격적인 형 집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일사 천리로 2000년에는 스가야 토시카즈 의 무기징역이 확정 된다.

 

하지만 이렇게 정말 재수 없는 스가야 토시카즈 를 하늘이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가엽게 여겼던

것이었을까? 우연히도 1999년 한 사건의 수사 과정중 DNA 조사 기법이 상당한 불확실성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걸 일본 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일본 언론에 의해 스가야 토시카즈

일명 아시카가 사건(足利事件) 에 얽힌 의문점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조차도 그냥 무시당해버렸고 그렇게 또 세월은 하염없이 흐르고 무려 17년이나 지난후

가족들이 DNA 재감정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재감정 요청을 최초의 일본 지방 법원에서는 묵살했으나

결국 도쿄 고등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이 나왔으니

(사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다 예측하고 있겠지만) 최초 발견된 정액의 DNA와 스가야 토시카즈 가

딸딸이(DDR) 친 휴지 DNA가 일치하지 않는다는것이 2009년 5월 최종 결론으로 나온것이다! 

 

스가야 토시카즈의 DNA와 범인의 DNA가 일치하지 않음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스가야의 변호인단

 

그리고 2009년 6월 1일 스가야 토시카즈의 변호인단은 이를 근거로 스가야의 형 집행 정지를 정식 요청하

게 되고 3일뒤인 6월 4일 스가야 토시카즈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재판 시작 전의 용의자 석방이라는 결과

가 되어 감옥을 빠져 나오게 된다 결국 스가야 토시카즈 는 이렇게 17년간의 억울한 감방 살이를 마치고

회의 햇빛을 보게 된다.

 

감방 살이를 마치고 17년만에 다시 사회의 햇빛을 본 스가야 토시카즈(菅谷利和)

들어갈때는 아저씨 였는데 나올때는 이미 이렇게 백발의 노인이 된 후였다

 

변호 인단으로부터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는 스가야 토시카즈

 

그리고 2010년 3월 26일 석방 후 재심 최후 공판에서 스가야 토시카즈 그 는 무죄를 받게 된다.

국가 로부터 우리 돈으로 약 10억원 가량의 배상금(복역 생활에 대한 보상금 8000만엔 재판 비용 1200만엔)

을 받게 되었고 이 당시 좆까 니가 범인이야 감방으로 꺼져라며 스가야를 깜방으로 쳐넣은 일본 판사

검사들은 최후 공판이 끝난후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17년 반 동안 긴 세월동안 자유를 뺏어온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라며 스가야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게 된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일을 겪은 스가야 토시카즈 입장이라면 감방 생활로 인해 이미 자신의

17년 인생이 다 날라가 버렸는데 이제와서 10억을 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돈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참고로 스가야 토시카즈의 부친은 이 사건으로 인한 아들의 체포 후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심부전으로 사망하였고 스가야 토시카즈의 모친은 아들의 무죄를 믿고 있었으나 그가 석방되기 2년전인

2007년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이 사건을 봐도 상당히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충격과 공포 충공깽의 심정이 드는데

일본 내에서도 일본의 부실 과학 수사가 빚은 참극 일본 경찰 일본 검찰 일본 사법계 치욕의 흑역사

스가야 토시카즈 사건 이 사건이 충공깽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여운으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스가야 토시카즈 가 무죄를 받고 석방된후 2년후인 2012년에는 일본에서 스가야 토시카즈 사건

을 모티브로 한 5부작 드라마 추정유죄(일본WOWOW) 가 제작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스가야 토시카즈 사건(아시카가 사건(足利事件)) 의 전말이다.

 

참고로 이 사건은 폐쇄적이고 고개 뻣뻣하고 깐깐하고 관료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사법계가

처음으로 고개를 숙인 사건이고 일본 재판 역사에 남을 일본 검찰의 완벽한 패배이기도 하다. 

스가야 토시카즈 사건(아시카가 사건) 이 사건은 사법이 제대로된 규정과 제어 장치 없이 폭주해서

함부로 나가게 될 경우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지 법을 휘두르는 위치에 있는 한 나

사법 당국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것이지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될수 있는 계기를 우리에게

상기 시켜주는 사건이 아닐까?

 

 


3줄 간단 요약

 

1. 남자들 딸딸이(DDR) 치고

2. 휴지 아무데나 버리지 마라

3. 진짜 좆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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