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70주년 기념 육이오 참전 용사였던 필자의 외조부 이야기

 

한국 전쟁 참전 용사

이 글은 필자의 외조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외조부는 일제 강점기 시절

겪은 고난, 일본에서의 생활,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온 후 군대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희생을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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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군대 경험, 전쟁 역사, 전쟁 생존기, 한국전쟁 기념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

뛰어난 필력과 상당한 작품성으로 평가가 후한 

일본의 착각물 라이트 노벨 모치츠키 노조무(餅月望) 작가의 작품 

티어문 제국 이야기 ~단두대에서 시작하는 황녀님의 전생 역전 스토리~ 

(ティアムーン帝国物語~断頭台から始まる、姫の転生逆転ストーリー~) 

입니다

 

6.25 전쟁 70주년

왼쪽의 동전이 서기 1922년(다이쇼 10년) 에 일본 제국이 발행한 100년 다 돼가는 일본 동전입니다 

동전에 대일본 대정 10년이라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의 동전이 서기 1938년(쇼와 12년) 에 일본 제국이

발행한 동전입니다

 

동전에 대일본에다가 소화 12년이라고도 불리는 쇼와 12년이라고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블로그에 2017년 4월 15일에 작성한 글에서 필자는 여러분들께 우연히 방 청소하다가

저 동전 두 개 발견했다면서 지금은 고인이 된 외조부가 일본에서 있을 때 가지고 온것이라고

이야기를 드리며 나중에 기회 되면 썰 한번 풀어보겠다고 언급을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2년 솔직히 지금도 이 썰 풀어도 괜찮은 건가 싶어서 망설여지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그냥 이 글을 혼란하고 다사다난했던 일제시대 35년과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의 기쁨도 잠시

해방 전후 극심한 좌익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과 갈등 결국엔 전쟁까지 가는 비극을 겪으며

그후 잿더미만 남은 1950년대 1960년대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동남아시아 필리핀과 북한에게도

무시당하던 최빈국 거지 국가에서 하면 된다는 의지 하나만 가지고

 

끝내 한강의 기적 산업화를 일궈냈던 격동의 대한민국 근현대사 그 시절 일반 민초라 할 수 있었던

이런 사람들이 나보다 앞선 시대에 이 한반도 대한민국 땅에서 이렇게도 살았었겠구나 하고

흥미 가지고 읽어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게 필자가 이 썰을 푸는 가장 큰 목적이자

의의 일 테니까요

 

한국 현대사 이야기

[1] 젊은 시절 

 

필자의 외증조부는 흔한 구한말 위정척사 사상을 가졌던 영남 유림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위정척사 사상이란? 네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평소에 흔하게 일컫는 아직도 이 대한민국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며 근간으로 작용하는 조선 씹선비 좃유교 유교 탈레반 

 

성리학 외의 모든 사상 종교 학문은 노땡큐 거부 소중화 사상 중국을 사대주의 하며 대대손손 

형님으로 모시는 이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 과학 기술과 기술자들을 천시하고 엄격한 신분제 속에서 

평생을 공자왈 맹자왈 타령하며 경치 좋은 곳 찾아다니며 생각나는 대로 시조랍시고 읊어대면서만 

살면 모든 게 장땡인 줄 아는 그 사상을 말합니다 

 

이러던 외증조부였던 만큼

1905년 제 2차 한일 협약(だいにじにっかんきょうやく 第二次日韓協約) 을사조약과

1910년 경술국치(日韓併合) 한일합병 시기에는 당연히 일본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나는 대열에 합류

그 후 집안은 한순간에 풍비박산 나고 참으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수많은 역경과 고생들을 하였다고

합니다

 

찢어질듯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굶어죽는 자식까지 있었을 정도로 심각했던 가난의 굴레가 끝내는

외증조부의 생각을 완전히 변하게 만들었던 걸까요? 필자의 외조부가 태어나게 되자 그때까지 대략

10여 년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에만 매진했었던 외증조부는 이젠 더는 아니다 싶었는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경상도에 정착을 하게 됐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필자의 외조모가

사는 동네 그곳에 말이지요 어떻게 보면 필자 외가의 역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젊은 시절 2

 

외증조부가 그때까지 하던 독립운동도 내려놓고 한때 조선 선비 유림이었던 자존심도 모두 다

내던져버리고 근처의 일본인 밑에서 일하며 자식들과 처를 위해 당장 하루하루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참으로 부단히도 노력을 많이 했으나 안타깝게도 사정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허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은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걸까요?

자신의 아버지 일을 도와주던 필자의 외조부를 어린 녀석이 영리하니 재주가 많아 보인다면서

그 일본인 부자가 평소에 상당히 좋게 봐주었는지 자세한 일의 전개 과정은 알지 못하나

최종적으로는 이 눈여겨봄과 함께 필자의 외조부와 외종조부 외고모할머니 삼남매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외증조부 집안의 오랜 가난도 드디어 한줄기 빛을 찾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고 하고요

필자가 알기로는 당시 이 일본인 부자가 자식이 아무도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3] 일제 시대

 

외지에서 온 조센징이라고 알게 모르게 깔보는 시선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와 반비례로 여러 가지로 도와주던 마음씨 좋은 일본인들도 참 많았었고 무엇보다도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과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었다고 노인이 된 외조부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일본에서의 생활을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두고두고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일본 본토에서 배워나갔던

외조부의 많은 지식들과 경험들 네이티브 스피커 부럽지 않게 습득하게 된 완벽한 일본어& 영어 실력

여기다 낯선 타지 생활 중 만나게 된 외조모와의 행복한 연애 생활 및 풍요로운 재물들까지

아마 평온했던 시절이었다면 외조부의 인생은 이쯤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쓸게 없는 평생을

양지에서 살다간 흔하디 흔한 일제 시대 평범한 한 조선 출신 남성의 인생사가 됐을 것입니다만

휘몰아치는 역사라는 이름 하의 혼돈의 세월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리게 됩니다

 

전쟁 중 가족의 희생

[4] 일제 말~ 6. 25 한국 전쟁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발발까지 급박하게 돌아가던 격동과 혼란의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 국제 정세 이 시기 

 

평소 남자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뜻을 품고 있었던 필자의 외조부는 

군 경력을 쌓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나라와의 청일 전쟁을 승리하고 최강대국 러시아를 러일 전쟁을 

통해 크게 한방 먹였으며 대만과 조선을 합병하고 만주까지 몽땅 먹어 치우며 동남아로 밀고 내려가는 

무서운 기세로 쾌속 질주만을 하는 것 같았던 일본 제국의 융성과 번영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1941년 잠자던 사자 천조국 미국을 무심코 깨운 죄로 얼마 못가 순식간에 

풍비 박산이 나버리고 말았고 제 2차 세계 대전 말 태평양 전쟁의 피바람이 휘몰아치던 이 시기 

일반 서민들은 진짜 일본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어리석은 일본 군부 인사들로 인해 말 아니게 

너무 고통스러운 일상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그 당시의 일본 제국 주민들이 겪었던 이런 말 못 할 고난과 역경의 삶의 연속 

자신들의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도전했던 위정자들이 한 짓에 대한 대가를 단단히 치른 거라고도 

평가할 수 있겠으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 제국이 완전히 궁지로 몰리며 패색이 짙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본격적으로 전개된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 중에 

참으로 안타깝게도 필자의 외조부는 자신의 남동생 외종조부를 잃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나라 없는 백성으로 나고 자랐었기 때문에 광복이 왔을 때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되찾아서 

기쁘구나라는 생각보다는 기분이 묘한 게 나도 이제 드디어 한 나라의 떳떳한 국민이 될 수 있는 건가 싶어서 

기뻤었구나라는 말 이런 마인드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솔직히 필자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광복 그리고 그 후 5년을 살고 있었더라면 

여동생도 한국에 돌아가기 싫어하겠다 일본 사회에 완전히 적응도 완료 거기다 여러 인맥들도 많이 

쌓아둔데다가 돈도 많이 벌었겠다 예쁜 연인도 있겠다 

일본에서 그대로 하던 거 마저 하면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1949년 1950년 풍전 등화의 앞날에 놓인 조국 대한민국의 위기 앞에서 

필자의 외조부는 영원히 두고두고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될 총 두 번의 큰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우선 첫째 일본 사회에 동화되기로 결심하고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 조선으로의 귀환을 거부한 

여동생과 이별 한국으로의 귀환 

 

큰 결심을 가슴에 품고 바삐 오느라 재산도 마저 처분하지 못한 체 현해탄(대한해협) 을 건너와 

외조부와 외조모가 정착한 집 그 집 네 맞습니다 여러분 이쯤 하면 눈치 빠르신 분들은 다들 벌써 

눈치채셨겠지요? 이 집이 현재는 필자가 외갓집이라고 부르는 집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역사 깊은 집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지네요 

 

그럼 이어서 두 번째 외조부의 큰 결단 그건 바로 1950년 6.25일 소련 스탈린과 중공(중국) 마오쩌둥 모택동의

지원을 등에 업고 불법 무력 도발 남침한 김일성으로 인해 벌어진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 참전

 

외조부 같은 경우는 가지고 있었던 군 경력과 뛰어난 영어 실력 외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이 시기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장교로서 대한민국 군인의 길을 처음

걸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갓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제 살았던 집을 돌아 보는데 사람이야 오죽하겠냐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모 형제 다 내버려두고 사지를 제 발로 찾아가는 사람이 어딨냐고 일본에서 머나먼 귀환의 여정을

함께 했던 외조모가 전쟁터로 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하면서 말려 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어렵게 다시 일으켜 세운 나라가 저렇게 공산당들 때문에 어지러운데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냐면서 나라를 다시 잃어버리면 이번에는 진짜 못 찾을지도 몰라

임자 조선이 있어야 조선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 거야 라면서 도무지 요지부동 그 고집을 말릴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호기롭게 나라를 위한다는 마음 하나로만 나섰지만 이 시기의 젊은 외조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겁니다

피난 가거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도 됐을 일을 6.25 전쟁 참전이라는 자신의 순간의 선택이 가져올

비극을

 

고민 끝에 어렵게 풀어놓기 시작한 이야기 원래 계획대로 라면 글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이 맞겠으나 그랬다가는 또 21세기 대한민국 대난독 시대에 아무나 쉽게 읽지 못할 수준의

압도적인 클라스의 썰이 될 거 같아 이쯤에서 2탄을 기약하기로 하며

 

끝으로 덧붙이자면 필자의 외조부랑 헤어져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기로 했던

필자의 외고모할머니는 해방 후에도 변함없이 자신을 거둬주고 길러주며 사랑을 주었던 마음씨 좋은

일본 부자 집안의 후사를 잇는 정식 딸이 되어 일본 남성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현재는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손녀가 일본에서 성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워낙 민감한 문제이므로

자세한 것을 밝힐 수는 없으나 필자의 존재 그녀도 잘 알고 있으며 그녀가 출연한 작품 시간 날 때마다

보고 있습니다 많은 성우팬 성덕들이 그녀 관해서 이야기하는 거 보면 어떨 때는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고 웃음이 나오고 그러더군요 자 그럼 진짜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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