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크루즈 와타나베 켄 주연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진짜 주인공과 실화를 알아보자

 

 

지금 청소년이신 분들은 잘 모르실수도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0년전인 2003년 미국 할리우드(Hollywood) 는

 

톰 크루즈(Tom Cruise), 와타나베 켄(わたなべ けん | Watanabe Ken), 토니 골드윈(Tony Goldwyn)

코유키(고유키 こゆき | 小雪 | 加藤小雪 | Koyuki), 사나다 히로유키(さなだひろゆき | 真田広之 | 下澤廣之) 등의

 

동양 서양 동서양을 막론하는 연기파 배우들을 데리고 일본 역사에서 서양 근대 문물이 막 쏟아져 들어오던 시대였

던 19세기 일본 이 시기에 벌어진 일본 역사의 주요 전쟁중 하나인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せいなんせんそう )) 을

바탕으로 일뽕 한 사발 거하게 처맞은 할리우드 대작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 를 선보이게 된다.

 

참고로 세이난 전쟁은 격동의 시대였던 19세기 일본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주요 전쟁으로 평가 받고

있으니 일본 역사나 이시기 일본 근현대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있으신 분들은 따로 더 이것저것 찾아보시기

바란다.

 

원래 할리우드가 이전에도 간혹 가다보면 일뽕을 한 사발씩 거하게 처맞고 일본을 상당히 미화하고

빨아재끼는 영화 작품을 종종 선보이는 경우가 있긴 했었는데 이 영화를 본 기억이 여전히 있으신 분들은 잘아시겠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일뽕을 한사발씩 상당히 많이 거하게 처맞고 일본 사무라이(무사 japanese samurai 剣士)

들을 극중에서 정말 아름답게 정의롭게 숭고한 이념과 정신을 가진 집단 전통과 가치관을 고수하고 이를 계승해 나가

는 멋있는 집단으로만 미화하고 있다.

 

하여튼 일본 사무라이 들을 정말 아름답게만 미화한 할리우드 대작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

이 작품이 한국에서 2004년에 개봉했으니까 개봉된지도 어느덧 10년이다. 당연히 이 작품을 이때 당시에 보셨던

분들도 이제는 각자의 기억에서 이런 영화가 있었나 하고 가물 가물 해 하는것은 어찌보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일것이다.

 

그런즉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이 작품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조금만 하고 넘어가자면

극중에서 톰 크루즈는 일본에 가서 정말 파란만장한 일들을 많이 겪으며 안해도 될 온갖 생고생 들을 많이 하게

된다. 참고로 이 영화속에서 나오는 설정인 미국인 주인공 및 미국 설정 배경은 모두 거짓말

하지만 이 라스트 사무라이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맡았던 네이든 알그렌 대위역의 모티브 이자

이 라스트 사무라이 영화의 소재가 된 실화의 주인공이 실제로 그때 당시 일본 역사에 존재 했었다

사실을 여러분은 다들 알고 계시는가?

 

그래서 오늘은 필자가 격동의 혼란기였던 19세기 일본 근현대사 속에서 파란만장한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며

일본 역사의 한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한 외국인이자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소재 및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맡았던 네이든 알그렌 대위 역의 모티브가 된 실제 주인공 프랑스 군인 

줄스 브루넷(Jules Brunet) 의 업적과 그에 대해서 소개를 한번 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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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스 브루넷(쥘 브루네) 과 마지막 사무라이

 

프랑스의 군인이었던 줄스 브루넷은 1838년 프랑스의 벨포르 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벨포르는 프랑스의 동쪽 독일과의 접경 지역의 지명

 

1857년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 에서 포병술을 전공하여 학위를 취득한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대한 소개

 

X 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며, 프랑스 국가 엘리트 교육 기관인 그랑드 제콜(grandes écoles) 가운데 하나이다.

프랑스 혁명 기간이던 1794년 유명한 수학자이자 해군 장관을 지낸 가스파르 몬제(Gaspard Monget, 1746~1818)

에 의해 에꼴 상트랄 데 트라보 퓌블릭(Ecole centrale des travaux publics) 으로 출발했다.

 

1년 후 현재의 교명으로 변경하였다. 1805년 황제 나폴레옹 1세(Emperor Napoléon Bonaparte, 1769~1821) 에

의해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군사 학교가 되었다.

 

그후 프랑스 군인 줄스 브루넷(Jules Brunet) 은 1862년부터 1867년까지, 프랑스군의 멕시코 원정에도 참전하게

된다.

 

멕시코 원정

 

1861~ 1867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대(對) 멕시코 간섭 전쟁

1854~ 1855년의 혁명 성공 후 멕시코 정부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하여 1857년 헌법을 제정했으나 교회 등의

보수 세력은 이에 반대하여 1858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3년간의 내란 끝에 대통령 B.P. 후아레스가 이끄는 자유파가

다시 승리하였으나 1861년 재정난으로 외채 상환을 중지하였기 때문에 그 해에 빡친 영국, 에스파냐, 프랑스 3국은

베 라크루스항(港) 을 봉쇄하였다.

 

영국, 에스파냐 양국은 이듬해 철군했으나, 아메리카 대륙에 카톨릭 제국을 수립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나폴레옹 3세(Emperor Napoléon BonaparteIII) 는 프랑스 군을 내륙으로 진군시켜 멕시코 시티를 점령

1864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大公) 을 황제로 삼아 멕시코 제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후아레스가

지휘하는 혁명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은 데다 먼로주의에 입각한 미국의 항의 등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고 당연히

원정은 실패하게 된다.

 

야심으로 가득찬 젊은 프랑스 군인이었던 줄스 브루넷은 이 멕시코 원정에서 자신의 용맹함과 군사적 재능 및 자신이

가지고 있던 뛰어난 전략 전술을 만천하에 떨치며 프랑스군에서 높은 명성을 얻게 되고 그는 이때 거둔 눈부신 공으

로 인하여 프랑스 군인들에게 최고의 영예라는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까지 수여 받게 된다.

 

 

레지옹 도뇌르

 

1802년 나폴레옹 1세가 전장에서 공적을 세운 군인들에게 수여할 목적으로 처음 제정했다. 1998년에는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팀 22명 전원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한국인 중에는 이건희 삼성 전자 회장

조양호 한진 그룹 회장, 지휘자 정명훈, 이창동 감독, 임권택 감독 등이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1867년 줄스 브루넷은 이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자신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나라였던 동아시아에 위치한 일본 요코하마(Yokohama, 橫濱) 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맺은 프랑스- 일본간 최초의 군사 협력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프랑스 군인 줄스 브루넷은 1867년부터 일본에서 당시 일본의 최고 지도자였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とくがわよしのぶ) 쇼군(將軍) 의 군대인 첨병대를 훈련 시키는 교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 에도 막부)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의 군대였던 첨병대 훈련 장면이다.

 

일본에서 체류하며 자신이 맡은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던 줄스 브루넷은 점차 일본의 전통과

문화에 깊이 매료 되게 된다.

 

그런데 이 당시 일본은 하루하루가 상황이 급변하는 정치적 혼란기를 통과하고 있던

중이었다.

 

1868년초 일본 메이지 천황(明治 天皇) 은 도쿠가와 막부 쇼군 세력 양이파(洋夷派) 세력들에게 600여년간

쇼군들이 누려왔던 최고 국가 권력을 공식적으로 되찾을 것을 천명하게 되는데

 

메이지 천황은 이 당시 몇몇의 유력 가문들에 의해서 지지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일본의 개화 세력인 존왕파(尊王派 개국파) 세력

 

메이지 천황과 일본의 개화 세력인 존왕파 세력의 천황(天皇) 으로의 권력 이양 요구에 대해서 줄스 브루넷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첨병대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도쿠가와 막부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은 당연히

거부를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향후 일본의 운명을 건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 전쟁이 바로 보신 전쟁(戊辰戦争 (ぼしんせんそう)) 이다.

 

 

보신 전쟁

 

일본 메이지 정권이 도쿠가와 막부에게 완벽한 권력의 반환을 요구하자 이에 불복하여 친(親) 도쿠가와

막부 세력인 쇼군(將軍) 세력 양이파 세력이 무진년(戊辰年) 인 1868년 일본 전토에서 일으킨

내란 사건

 

참고로 메이지 천황과 일본의 개화 세력인 존왕파 세력은 서양에 개방할것을 주장하는

개화파 세력이었는데 반해

 

친 도쿠가와 막부 세력인 쇼군 세력은 이때까지 일본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쇄국 정책의

지속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싸움은 친 도쿠가와 막부 세력인 쇼군 세력 양이파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전개 되었고 이에 따라 메이지

천황과 일본의 개화 세력인 존왕파 세력의 군대가 에도(江戸, えど) 현재의 도쿄(Tokyo 東京) 에 접근해오자

레옹 로슈 프랑스 대사는 에도를 수성할 방책을 수립 하였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은 레옹 로슈 프랑스 대사가 제안한 에도를 수성할 이 방책을

마지막 순간에 끝내 거부해 버린다.

 

전황은 점점 막부군에게 불리하게만 전개되어 가고 이에 따라 친 도쿠가와 막부 세력인 양이파 세력은

1868년 3월 29일 고슈 가쓰누마(甲州勝沼の戦い) 전투에서 메이지 천황과 존왕파 세력의 군대에게 크게

대패를 하게 된다.

 

이후로도 거듭되는 막부군의 전투 패배와 함께 1868년 5월 에도 현재의 도쿄는 신정부군에게 포위 당하였고

그렇게 쇼군은 항복을 하고 만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 군인 줄스 브루넷이 공들여서 양성하고 있던 첨병대를 포함한 쇼군 군대의

일부 잔존병들이 전투의 패배에 불복키로 결정을 하게 된다.

 

이윽고 막부군의 잔존병들은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제독의 지휘 아래 일본의 북쪽으로 퇴각을

거듭하면서도 끈질긴 저항전을 이어 나갔는데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1868년 9월 3일 에도는 도쿄로 개명 되었고 이곳을 수도로

천명한 메이지 천황은 이곳에 자신의 황거(皇居) 를 새롭게 두게 된다.

 

하루하루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본의 정세속에서 이때 당시 일본과 친목질을 하고 있었던 줄스 브루넷의 본국 프랑스

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조약을 맺고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내전에 대해서 발빠르게 중립을 선언하였고

 

이와 더불어 자신이 파견해서 이때까지 일본내에서 잔존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대한 공식적인 철군을 정식으로

명령하였다.

 

그러나 줄스 브루넷을 비롯한 그와 일본에 함께 파견된 일부 프랑스 군인들은 이 명령에 불복 자신들 독단으로

일본에 남기로 결정을 해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프랑스군을 떠나 막부군이

에노모토 다케아키 제독의 지휘 아래 머물고 있던 홋카이도(Hokkaid 북해도 北海道 ほっかいどう) 로 가서 합류

이들과 함께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게 된다.

 

홋카이도에 도착해서 에노모토 다케아키 제독이 이끄는 막부군에 합류한 줄스 브루넷은 이곳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며 즉시 반격을 개시 홋카이도에 남아있던 메이지 천황의 군대 신정부군을 격파하고

현재 하코다테(函館市, はこだてし) 에 위치한 고료카쿠 요새(五稜郭, ごりょうかく) 를 탈환하기에 이른다

 

고료카쿠 요새 탈환 이후 줄스 브루넷은 에노모토 다케아키 제독과 함께 이곳을 도쿠가와 막부군 세력의 거점으로 삼았고

 

그뒤로 줄스 브루넷이 오랫동안 공들여서 양성했던 첨병대를 선두로 막부군은 진격을 개시 1868년 12월에 이를

무렵에는 홋카이도 전역의 모든 부족 세력을 격파하고 승리를 이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승리를 바탕으로 1868년 12월 15일 이들은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國, 일본어: 蝦夷共和国 (えぞきょうわこく)) 의 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또한 지금까지 천황군에 대항해서 막부군을 잘 이끌고 있었던

다케아키 제독은 이 신흥 독립 국가 에조 공화국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로 추대 되었다.

 

서구 열강인 유럽의 국가들도 사실상 이 에조 공화국의 건국을 인정하였고 (일본 역사상 유일한 독립 공화국)

오직 메이지 천황만이 이 독립 공화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연히 메이지(明治) 정부의 군대인 신 정부군 천황군(天皇軍) 은 에조 공화국을 침략할

준비에 들어갔고 줄스 브루넷 또한 이에 대항해 에조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결전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당시 에조 공화국의 군대는 3000명 정도였는데

이들은 프랑스 군과 일본군이 연합된 양상이었고

 

이들 가운데는 줄스 브루넷과 함께 에조 공화국에 합류한

프랑스 군인 포트랑, 마를랑, 카제너브, 부피에 등이 4개의 여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1869년 3월 에조 공화국을 정벌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의 군대인 천황군 10000 여명이

홋카이도로 출병을 하게 된다.

 

이들에게 대항하고자 줄스 브루넷과 에조 공화국의 군대는 결사의 각오로

항전에 임하였지만

 

압도적인 전력차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1869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진 하코다테(函館)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그들은 결국 패배하기에 이른다.

 

고료카쿠 요새가 함락될 무렵 그곳에는 겨우 800명의 에조 공화국군이 메이지 정부의 군대인 신 정부군

8000 여명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 하코다테 전쟁을 끝으로 600 여년간 일본에서 계속된 막부 쇼군의 시대가 드디어 완벽하게 막을 내리

고 본격적으로 새로이 메이지 시대가 일본에서 열리게 되었다.

 

당연히 줄스 브루넷의 일본 체류도 여기서 끝이 났고 탈출에 성공한 그는 중형 프랑스 군함 코에트로곤에 몸을 싣고

본국 프랑스로 귀국하게 된다.

 

프랑스로 귀국한 줄스 브루넷은 본국에서도 대단한 명성을 누렸고 나폴레옹 3세의 명령을 불복

한것에 대한 징계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쌓은 풍부한 실전 경험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줄스 브루넷은 다시 프랑스군에

정상적으로 복귀를 하였고 승승장구하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훗날 장군으로까지 진급하게 된다.

 

거기다 줄스 브루넷과 그를 따르던 일부 프랑스군의 이러한 일련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めいじじだい)) 에 접어든 일본과 프랑스의 친목질 협력 관계는 굳건하게

지속되었다.

 

더불어 도쿠가와 막부 시절 부터 시작된 프랑스 일본간의 군사 협력 사업도 이후에도 계속 유지 되어

1872년, 1884년에 두 차례 더 프랑스군이 일본에 파견 되어

 

이제는 도쿠가와 막부의 군대인 막부군이 아닌 메이지 정부의 군대인 신정부군 근대화를 프랑스군이

지도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 2명의 프랑스 군인은 외국인 최초로 일본 무술 도장의 회원으로 승인되기도 하였고,

이들은 일본 무도의 최초 외국인 수련생들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1886년에는 폴리테크닉 출신의 엔지니어 루이 에밀 베르탕이 일본 최초의 신식 함대 구축을 지도

해주었고

 

이후 1919년에는 프랑스 엔지니어들이 최초의 일본 공군 창설을 지도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뛰어난 프랑스 군인이었던 줄스 브루넷 그의 이름은 세간에서 완전히 잊혀졌지만 그러나 일본인

들은 마지막 사무라이들과 함께 싸웠던 전사로서 아직도 줄스 브루넷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프랑스 군인 줄스 부르넷(1838- 1911)

 

 

요약

 

톰 크루즈, 와타나베 켄, 토니 골드윈, 코유키, 사나다 히로유키등 동서양을 막론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 할리우드 대작 라스트 사무라이 이 영화의 소재 및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맡았던 네이든 알그렌 대위 역의

모티브가 된 실제 주인공은 줄스 브루넷이라는 유능한 프랑스 군인이었고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전략 전술을 바탕으로 메이지 천황과 일본의 개화 세력인 존왕파 세력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짧게나마 홋카이도에 일본 역사상 유일의 공화국 에조 공화국이 건설 될수 있도록 상당한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인과 경찰은 자신을 알아봐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해서 군경은 자신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준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언제든지 바치는 사람들이라는 말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전략전술을 가진 프랑스 군인이었던 줄스 브루넷이 

이 당시 일본에서 돌아가는 판세를 모르고 있었을리가 없다 얼마나 에조 공화국 막부군이

천황군에 비해 불리한 전황인지는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것이다

헌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준 사람인 도쿠가와 막부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을

위해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해 싸웠던 줄스 브루넷 그래서 그가 훗날 고국에 돌아가서도

뜨거운 환영과 승승장구 할수 있었던것이 아니었을까?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여러분들 모두 19세기 일본 근현대사 격동의 혼란기

그 한가운데 에서 외국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쇼군을 섬기며 군인으로서 자신만의 긍지와

명예 정의를 가지고 일본 역사의 한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했지만 이제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역사속에서 사라져버린 프랑스 군인 줄스 브루넷을 모두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주의 할점

 

메이지 천황과 일본의 개화 세력인 존왕파 세력과 친 도쿠가와 막부 세력인 쇼군 세력 양이파 세력을 흔히들 서양

과 개국하자는 세력과 쇄국 정책(고립 정책) 세력으로 단순하게 나눠서 생각들 하시는데 이게 아주 틀린말은 아니

지만 정도의 차이 방법의 차이가 있을뿐 그래도 이 당시 두 세력 다 개항하는것 자체를 아주 나쁘게 보지는 않고 있었

다는것을 필히 명심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이 싸움은 누가 일본에서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싸움 정도로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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